오랜만에 하는 덕질이라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전시회나 앨범이 나올 때마다 굿즈가 쏟아졌고, 그걸 하나씩 따라갔다. 앨범을 사고, 트레깡을 하고 원하는 멤버나 포카가 나올 때까지 사고 또 샀다. 덕메들이 굿즈를 대신 구매해 주기도 했고, 그럴 때면 괜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만나서 덕메와 하는 일은 대체로 비슷했다. 앨범깡을 하고, 서로의 최애 포카가 나오면 바꿔주고, 포카와 굿즈를 정렬해놓고 인증사진을 찍고, 최애에 관해 이야기했다.
분명 즐거웠는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 서로 관점이 다를 것 같은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조심스러웠고,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지만, 그 ‘같음’ 안에 얼마나 다른 생각들이 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즐거움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불편함을 말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오는 아쉬움에 가까웠다. 사실 그때는 내가 왜 그렇게 말을 아끼는지도 잘 몰랐다. 그냥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서로 다른 관점을 굳이 말해야 할까. 이게 왜 아쉬울까. 분명 덕메들도 내게 이야기하지 못한 말들이 많을까?
덕질은 보통 취미의 영역으로 분류되고, 일상에서 벗어난 활동으로 여겨진다. 덕질을 한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좋아하는 게 있어서 참 좋겠다는 말을 쉽게 건넨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웃을 일이 하나 있어 분명 위로가 된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덕질은 일상과 완전히 분리된 활동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 안에서도 스트레스받고, 불편함을 느낀다는 사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외부에서든 내부에서든 덕질은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미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합의 앞에서 말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실제로 덕질을 할수록, 케이팝 산업과 그 시스템 안에서 불편한 점들이 생겼다. 소비하는 것 외에는 덕질의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굿즈나 앨범을 구매하면서 환경 문제를 의식하게 되지만, 굿즈를 볼 때마다 최애가 떠올라 구매하고 있는 모순적인 날 발견한다. 게다가 귀엽고 나중에 사려면 웃돈을 얹어서 구해야 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판매 시기가 되면 꼭 사게 된다.
물성이 있는 상품 외에도 다양한 통로로 아이돌을 소비하고 있다. 무대를 통하지 않고도 아이돌의 모습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자체 콘텐츠는 재밌고, 최애의 새로운 모습을 알 수 있어 좋아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대 밖에서도 계속 촬영되고 스스로 보여줄 만한 상황과 모습을 연출해야 하고,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아이돌과 주변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이 걱정되기도 했다.
나 좋자고 하는 덕질이고, 아이돌도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말을 꺼내봤자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닐까. 결국 말을 아끼는 쪽으로 나를 밀어놓았다.
그럼에도 덕질이 거의 일상이 되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모른 척 넘기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고 싶어졌고, 덕메들과도 불편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최근에는 덕메들에게 아이돌 노조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온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아직 이유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반응이 꼭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관계가 대화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화는 조금 어색해졌지만, 그 후에 여전히 같이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해 이야기했다. 돌이켜보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데 망설임이 덜했던 건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이미 비슷한 연습을 여러 번 해봤기 때문인 것 같다.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고, 그에 대한 반응을 마주하는 시간은 나에게 일종의 실천이었다. 그 과정에서 같은 구성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가 꽤 다르다는 걸 몇 번 확인했다. 그래서 부정적인 반응이 꼭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조금 더 얘기해 봐도 되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콘서트에서 팬들과 직접 만나고, 대가를 바라지 않은 선물을 주고받고, 콘서트 내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응원법을 외치는 순간들을 떠올리면,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었다. 얼굴을 보고 고민하고, 판단을 잠시 유보해도 되는 시간과 공간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덕질을 하면서 느끼는 부대낌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돌과 팬이 케이팝 산업 안에 있는 한 그 구조에서 나 혼자 빠져나오거나 미뤄두는 것만으로는 시스템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이돌과는 불편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 하지만 덕메들에게 말을 꺼내 보는 것. 대안에 대해 어색하게라도 이야기해 보는 것. 그것을 지금의 나는 나름의 덕질의 방법이 되어가고 있다.
글쓴이 은팡
남자 아이돌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을 접하고 자연스레 탈덕을 했지만 또다시 남자 아이돌을 사랑하게 됐다. 페미니즘 지향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덕질에서 모순된 욕망을 경험하며 맘 편히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다.
해당 글은 AAD(ArtsActsDays)에서 진행한 '케이팝 하는 여자들'의 글쓰기 워크숍, ‘쿠킹 케이팝’의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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