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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불가 불안형 덕질에 끌리는 이유에 대하여

글쓴이
주라
사랑 그 안의 모순: 10년차 국민 프로듀서의 가시밭길
보이즈 II 플래닛의 파이널 무대가 끝난 뒤,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것도 잠시 친구 K와 새벽 3시까지 고민에 빠졌다. 또 ‘그런’ 사랑이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런’ 사랑이 무엇이냐.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볼 때, 안정적인 순위권의 연습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한결같이 소위 ‘정병존(데뷔권 경계의 불안정한 순위)’에 놓인 이들만 쏙쏙 골라서 사랑했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면 늘 ‘그러고’ 있었다. 안정권의 연습생에게는 큰 관심이 가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응원하던 연습생이 안정권에 진입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관심이 식어버렸다. 도리어 원픽의 순위가 데뷔권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 마음의 크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내가 정신병으로 간다’ 식의 사랑은 10년 넘게 반복되어 왔다. 이를 증명하는 우리의 몇 가지 덕질 이력을 공유한다.
Case 1) PRODUCE X 101
첫 원픽은 이미 데뷔한 그룹 출신의 소위 ‘중고 연습생’이었다. 그의 불안정했던 지난날들에 마음이 무너져 ‘반드시 데뷔시켜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보란 듯이 매번 순위발표식마다 1~2위를 다투는 연습생이 되었다. 그가 탄탄대로를 달리자 자극은 점차 옅어졌다. 그때 K는 나에게 별안간 19위의 연습생을 영업했다. 그 못지않은 서사를 보유한 타 그룹 출신의 연습생이었다.
원픽이 변경되자마자 운명의 장난처럼 그는 세미파이널 무대 직전에 프로그램 하차를 했고, 그 괴로움은 우리를 초고속으로 ‘진심행 열차’에 탑승시켰다. 하루하루 그의 생존과 복귀 소식만을 기다리며 사랑이 깊어졌다. 최종 데뷔 멤버가 된 전 최애보다 지옥 끝에서 돌아온 현 최애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당시 기준) 흥행이 보장된 데뷔 그룹이 아닌 현 최애가 돌아간 본 그룹 활동에 더 집중했다.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X1의 해체 가능성이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전 최애를 향한 사랑이 다시 불붙었던 것 같기도 하다.
Case 2) 보이즈 플래닛
각자의 픽이 모두 안정권으로 데뷔하는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이전에 비해 방영 중에도 우리의 정신은 꽤나 온전했고, 자연스레 데뷔 그룹에도 큰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Case 3) 보이즈 II 플래닛
이 역사는 2025년에도 반복되었다. 안정권 순위의 연습생을 픽한 우리는 몇 주간 투표만 하는 ‘즐겜러’의 삶을 보냈다. 그러면서 내심 ‘고통이여 (제발) 오라’ 하며 평온한 직장인의 일상에 스릴이 생기길 기다리기도 했다. 몇 주 후, 나의 원픽이 안정적으로 데뷔할 거라고 방심한 사이 그의 순위가 급격히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불안에 떠는 모습이 화면에 잡힌 순간, 나는 비로소 그에게 진심이 되었다. 또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엠넷플러스 앱을 설치하고 그에게 투표해달라고 간청했다. K 역시 첫 원픽이었던 안정권 연습생을 뒤로 하고 ‘간당간당한 순위’의 새로운 연습생을 잡았다.
최종 순위 8위까지 데뷔를 하는 파이널 무대에서 나의 픽은 7위, K의 픽은 9위의 순위로 마무리했다. 방송이 끝나고 우리는 직감했다. 오늘 이후 괴롭고 아플 사람도, 그래서 사랑이 깊어져 행복할 사람도 K라는 것을.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수년간 수차례 반복된 이 기이한 덕질의 역사를 복기하며 양귀자의 소설 『모순』 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대체 나는 왜 ‘그런’ 사랑에 끌리는 걸까?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순』 이 안진진의 남편찾기 스토리라면, 이 글은 내 기이한 사랑의 근원을 찾는 여정이다.
그들의 간절한 모습이 좋아서였을까? 하지만 서바이벌 출연자 중 간절하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나. 단순히 간절함의 크기가 사랑의 척도라면, 나는 101명의 연습생 모두를 사랑해야 마땅하다. 그러니 보편적인 간절함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데뷔하지 않길 바랐는가? 그를 양질의 무대로 계속해서 보기 위해서는 데뷔가 필수적이었다. 그때만큼은 나의 승진보다 그의 데뷔를 간절히 염원했으므로 이것도 정답은 아니다. 데이터가 쌓이고 고민을 더해갈 수록 그 이면에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삶의 양감을 만드는 ‘예측 불가능한 고통’]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모순』  작가의 말 중)
안진진은 부유하고 평온하지만 지루한 이모의 삶과, 가난하고 굴곡지지만 생명력 넘치는 엄마의 삶 사이에서 번민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때로는 불행이 삶의 부피를 키운다는 사실을. 그렇다. 나는 사랑하며 위태롭고 괴로운 순간을 가장 살아있는 순간이라 느껴왔던 것이다.
이는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었다. 나와 K는 지독하리만큼 통제적이며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플랜 Z까지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에게,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안정적인 사랑’은 매력이 없다. 매끄럽고 평평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가지려 하지 않는 ‘감정의 굴곡’을 바로 덕질에서 찾아온 것이다. 현실에서 기복을 덜어내는 만큼, 덕질을 통해 희로애락의 진폭을 더하며 인생의 밸런스를 맞추고 있었다.
위태로운 순위는 사랑에 빠지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고, 그 안에서 하루 하루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은 통제된 내 일상에 양감을 더해주었다. 안진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우리에게 없었던 것을 선택함으로써 삶의 모순을 완성해온 셈이다. 그렇기에 내가 오랫동안 위태로운 사랑을 좇아왔던 것은, 어쩌면 모순되게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핍의 이동]
흥미로운 지점은 최근 나의 변화다. 평생을 도파민 넘치는 ‘가시밭길’만 골라 걸을 줄 알았던 나는 요즘 유례없는 안정형 덕질을 이어가고 있다. 최애에게 유행하는 챌린지를 찍어 달라는 요청도, 소통을 자주 해달라는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저 밥 잘 챙겨 먹고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최애에게 관심이나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다. 전혀 새로운 방식의 사랑이다. 당분간은 이 팀의 존속이나 그의 아이돌 생활의 유지 가능성에 대해 맘졸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이 변화의 실마리는 현재 나의 현실에 있다. 요즘 나는 청소년기에도 하지 않았던 ‘진로 고민’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내 삶 자체가 이미 충분히 자극적인 지금, 나는 더 이상 사랑에서까지 스릴을 찾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내가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현재 내 삶의 결핍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지표였다. 삶이 견고할 때는 균열을 줄 사람을, 삶이 흔들릴 때는 나를 지탱해 줄 견고한 사람을 찾는다. 이 얼마나 지독하고도 투명한 모순인가.
[사랑의 동의어]
이제는 모순이 없는 덕질과 사랑과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 내 삶의 결핍이 어디로 흐르든,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또 다른 모순된 사랑을 찾아 나설 나를 이제는 기꺼이 긍정한다. 그 모순이야말로 나를 사랑의 순간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그것이 내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결국 덕질도, 사랑도, 인생도 모두 모순이라면, 우리는 그 모순 덕분에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순에서 시작되어 모순 그 자체로 완성되는 이 사랑이,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기대될 것 같다. 모순적이게도.
글쓴이 주라
사랑하는 것이 많아 자주 벅차오르는 사람. 케이팝 안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경험했다. 어떻게 하면, 이 깊고 넓은 사랑을, 잘 사랑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을 사랑한다.
해당 글은 AAD(ArtsActsDays)에서 진행한 '케이팝 하는 여자들'의 글쓰기 워크숍, ‘쿠킹 케이팝’의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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