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연애에서 얻은 깨달음. 당시 같은 과 동기였던 남자친구가 엄마와 나눈 대화를 공유해주었다. “옆집 00이는 여자친구 앞에서 개 흉내까지 낸다네. 너는 안그러지?” “으엑! 00이가?” 엄마 앞에서 지었던 환멸의 표정을 재연했던 그는,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두 손을 머리 위에 얹어 강아지 귀 모양을 만들며. “근데…나도 여친 앞에선 멍멍이인데! 쓰다듬어 주세요. 멍멍!” 내가 깨달은 연애의 개념은, 서로의 앞에서 한없이 유치하게 퇴행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인간 관계에선 힘의 차이가 발생하고, 어느 쪽이 더 유치해지는지, 만져달라고 배를 드러내며 뒤집는 포지션이 되는지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서열을 구분하는 행위를 뜻하는 ‘마운팅’. 나는 내 쪽이 여유롭게 쓰다듬는 쪽이 되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현실의 연애에서 기꺼이 내게 주도권을 쥐어주고 본인은 쓰다듬을 원하는 남자에게 끌렸고, 이게 ‘오빠’ 혹은 ‘상남자’ 포지션의 남자와의 관계는 금방 소멸하는 이유가 되었다.
지금까지 아이돌을 좋아했던 방식을 복기해 보면, 성인 전후로 나뉘어진다. 이성과의 긴밀한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여중-여고의 10대 시절에 좋아했던 아이돌은 오빠였다.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 학생 입장에선 인간을 상품화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생리를 상상할 수 없었다.(정보 접근성이 높아진 요즘은 다르겠지만) 화면 속의 멋진 오빠를 넘어, 언젠가 어른이 되면 그와 내가 결혼할 수 있다는 상상까지 품고 흔한 닉네임 00부인을 내 정체성으로 부여했다. 남녀상열지사를 알기도 전이니 섹슈얼한 상상까지 이어지지 않았다.(요즘은 ‘나페스’란게 있다고 하지만) 미성년 시절의 아이돌 사랑은 플라토닉한 꿈이었다고나 할까.
여중-여고를 벗어나 성인이 되고, 남녀공학 학교에 와서 부대끼다보니 현실의 남자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속 2D 남친, 가요프로의 3D 남친이 아닌 현실 남친. 방구석에서 만화와 아이돌만 좋아하던 나를 봐온 친오빠가 진짜 현실 인물인지 보고싶어 찾아왔을 정도로, 첫 연애는 오타쿠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10대 시절의 추억을 함께한 2D&3D 남친들을 멀리하고 현실의 남녀관계를 탐구하는 세계가 열렸다.
이성애자 입장에서 직간접 탐구 결과는 이렇다. 안정적인 연애의 역학관계에서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건 남자쪽이다. 남자의 구애와 여자의 승낙으로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주 희소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여자는 호감을 표현해 미끼를 던지기는 해도 ‘적극적 구애’라는 행위를 선택하진 않는다. 남자가 처음부터 이성으로 끌리지(여기선 ‘꼴리지’가 맞겠군) 않았던 여자와 진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본다. 그래서 여자는 호감을 보이고 다가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입장이 된다. 이성애자 성인 여성이 직접적으로 호감을 표현하는 것은 특이한 사례다. 남자가 고백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경우는 있어도.
반면 남자들은 연애시장에서 늘 도전자이고, 차은우같은 레벨이 아닌 일반적인 남자라면 거절의 경험이 계속 쌓인다. 현명한 남자라면 본인 레벨에서 어느 정도의 이성에게 고백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영점조절을 하고 현실적 연애를 목표로 다가가게 된다. 숱한 남자사람 친구들에게 이런 하소연을 들었다. 고백해서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다고. 여자들은 고백을 받는 입장이고 먼저 시도를 안 하니, 그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잘 모른다고.
그런데 아이돌판에서는, 일단 내가 20년 넘게 직간접 경험한 바에 따르면, 여자는 적극적 구애자의 입장에 선다. 현실 남자에겐 하지 않는 격한 애정표현을 일방향으로 한다. 물론 현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필부와는 여러모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그도 이런 직업을 갖게 된 것이고, 다른 차원의 그에 걸맞게 Fanatic의 감정이 따라붙는 거겠지만. 최근 콘서트에서 토롯코를 타고 최애가 내 쪽을 지나갈 때, 커미션으로 그의 상징 이모티콘을 붙여 제작한 네임보드를 봐 주길 바라면서 애타게 흔들었다. 그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든 건 나를 향해서 였다고 믿고 싶다. 그런 미약한 접촉을 경험한 순간, 오프라인에서 1:1로 대화하는 이벤트는 더욱 중독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산업의 원동력인 Parasocial Interaction*을 조금 맛본 느낌만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준 사회적 상호작용. 대중 매체, 특히 온라인 플랫폼에서 미디어 출연자들과의 간접적 만남에서 청중이 경험하는 상호작용.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신어사전)
최애의 사진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어차피 이 친구는 일반인으로 그냥 살았어도 여자에게 밥을 사는 일이 없겠지.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육탄전을 벌이는 여자들 때문에 오히려 아랫도리를 조심하게 되겠지. 연예인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도, 일단 큰 키와 좋은 골격과 비율에 단정한 얼굴에 온화한 품성까지 갖고 태어났으니 일반인으로도 그의 삶은 아이돌과 유사한 선상에 있었을 것이다. 꾸밈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여자와는 다르게, 눈에 띄는 준수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드물기도 하거니와, 거절당하는 일반인 남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는 걸 알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남자고백-여자승낙의 세계를 초월한 존재다. 내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어딘 가든 눈에 띄는 남자와 만났을 때 실감했다. 고백을 받는 남자의 옆에 붙어있으려면 보통 멘탈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인의 매력을 알고 그걸 즐기는 남자는 위험하다. 고교생 때 캐스팅되어 소처럼 연습하는 삶을 살아온 최애의 성장을 볼 때 드는 불안감도 그것이다. 스스로의 매력을 모르고 계속 아방하게 웃어주면 좋겠지만,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자신에게 꽂히는 무수한 시선이 익숙해질 것이다. 매력적인 너의 모습은 좋은데, 그 매력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듯한 모습에는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어차피 우리의 거리가 가까워질 일이 없는데도. (하지만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부부 사연에는 슬그머니 지저분한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이 글을 쓰다가 김희애, 유아인 주연의 드라마 ‘밀회’가 문득 생각나서 나무위키 페이지를 읽어내려갔다. 그러고보니 영화 ‘더 리더’에서도…미안하다 내가 낳았을 수도 있는 2004년생 최애야.)
성인이 되고나서 내 욕망과 애정의 양상을 복기해보면, 아이돌은 내게 극적 긴장감을 주는 ‘서브남주’같은 존재로 자리했던 것 같다. 서로 이성적 호감을 가진 상태에서 긴밀한 정서적 신체적 교류를 하는 것은 분명 즐겁다. 그리하여 ‘메인남주’는 일단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 이를테면 도달가능미라고나 할까. 연구에 의하면 애정 호르몬의 지속기간은 약 1년6개월~2년5개월이라고 나온다. 이번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연애의 지속기간이 저 정도가 되었을 때, 마음 속에 품게 되는 누군가가 등장했다. 내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닿을 가능성 없는 사랑을 품고 있어야 하는. 도달가능미와는 다른 추구미의 영역이랄까.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추구미로 머무는 것. 그렇게 늘 도달가능미의 현실남자와 안정적인 일상을 살고, 추구미의 아이돌남자는 관음과 망상의 세계에서 함께하기. 이렇게 병행하는 투트랙 사랑이었다. 이 기회에 세어보니 내 인생에서 현재 현실남자가 7번째, 아이돌남자도 7번째라는 사실에 놀랐다. 현실의 사랑은 2년 경과 후 큰 이벤트(결격사유)가 없으면 안정적으로 쭉 이어지고, 아이돌판의 사랑은 2년 전후로 자연소멸했다는 차이는 있다.
24년 1월의 어느날 우연히 트위터에서 본 위버스 라이브 움짤 하나로 지금의 최애 J군에게 입덕. 이제 사랑의 통상적 유효기간으로 알려진 2년차에 돌입했다. 최근 20여년 전의 최애 N군이 열연한 영화를 내 곁의 도달가능미 현실남자와 함께 봤다. 추억 속 최애의 본업 전환이 잘 풀려서 영화와 드라마로 계속 볼 수 있어 반갑다. 2년차에 접어든 이번 최애 J군도 배우의 기회를 잡아서 새로운 모습을 보기를 기대중이다. 메인남주가 시원찮을 때 나타나 설렘과 긴장감을 주는 서브남주로 오래 내 곁에 있어줬으면.
글쓴이 소조
해당 글은 AAD(ArtsActsDays)에서 진행한 '케이팝 하는 여자들'의 글쓰기 워크숍, ‘쿠킹 케이팝’의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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